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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책

'다이스케'라는 인물 중심으로 -그 후

'탈 없이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살아 있다고 하는 이 틀림없는 사실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요행으로 느끼기조차 한다.' p.8

 

근대 산업화가 준 육체적 안락함, 동시에 가져다준 인간의 불안과 고뇌이다.

다이스케는 잠을 청할 때 맥박 소리를 확인하면서 잔다. 심지어 자기의 의도와 무관하게 뛰는 심장에 두려움을 느낀다. 왜 유독 다이스케만이 이러한 불안을 가지고 사는 걸까.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집에서 안락한 나날을 보내는 다이스케는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느끼고 감지한다.

긴 사색의 시간 동안 그는 자신과 세상을 분리한다. 그리고는 자신이라는 존재와 세상을 구분짓고 정립한다.

그리고 이젠 존재한다, 그와 세상이.

그는 그를 정립하였다. 그에겐 그만의 세상이 존재하고 적어도 그에 한해선 완벽한 세상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세상이 존재한다. 애석하게도 그의 세상은 그렇지 못한 세상 안에 존재한다. 온전한 정신 또한 불온전한 육체와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는 그 고귀하고 온전한 정신은 육체의 뜀박질을 감지한다. 자신의 정신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육체의 속삭임을. 이젠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육체와 세상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예측할 수 없는 사고,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뛰는 심장은 그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안겨준다. 이것은 현실이다.

 

'그는 거울 앞에 설 때마다 그런 얼굴로 태어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p.9

 

극단적 안락함, 긴 사색, 자기 자신의 정립에 의해 나오는 나르시시즘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그의 외모를 매우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만족하고 있다. 자아 정립의 과정이고 결과이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에서 그는 또한 불안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그는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

 

'요즈음 사람들이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그런 소동을 일으킬까? 그건 방편이야' p.11

 

이해득실을 따지는 인간에 대한 모멸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이해관계를 통해 생성된 사회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낸다. 다이스케가 세상과 등지고 사는 이유 중에 하나일 듯 하다.

 

'나는 소위 사회생활의 경험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네. 고통스러울 뿐이지 않나?'

 

다이스케, 그에게는 사색이라는 그만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 이외의 것은 불필요하고 하찮게 여긴다. 그는 직접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그 생활에 대해 알만큼 지식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서이기 때문이기 보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그의 '사색 세계'와는 다르고 이질적인 세계여서 더욱 꺼려할 것이다.'라고 생각된다.

 

'닐 아드미라리'의 경지에 달해 있었다. 그의 사고는 인간의 어두운 세계를 접하고 깜짝 놀랄 정도로 촌스럽지는 않았다. 그의 신경은 그런 진부한 비밀을 캐내며 기뻐할 만큼 따분함에 시달리고 있지도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기분 좋은 자극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지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긴 사색 끝의 경지, 안락함을 통해 얻은 긴 사색의 시간은 그를 닐 아드미라리 경지에 가져다 놓았다. 그의 정신세계는 이미 온전히 정립 되었다. 그 무엇도 그의 정신세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다이스케의 말투는 지극히 태연하고 냉정하며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머뭇거리지도 않으며 아주 차분하다.

이 것을 깊고 긴 사색의 부작용이라 함은 어떨까. 아니면 오히려 지향하여야 할 것인가.

 

'자신의 교육이 다이스케에게 미친 악영향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서술자 대목인데 서술자는 다이스케 편인가 봅니다. 그 말은 결국 다이스케가 나소메 소시키를 충분히 대변하고 있다고 볼수도 있고 나소메 소시키 또한 아버지의 훈육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지 않았나 짐작해 봅니다.

 

'단지 자신은 직업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은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고귀한 부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다이스케가 직업을 가지는 동시에 그가 가진 정신세계는 파괴되어버린다. 결국 직업을 가지지 않고 보내는 시간은 그만의 정신세계를 더욱 지속시킨다. 또한 고귀하게 보전된다.

 

'아버지의 단순한 두뇌로는 이렇게 의미 있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 자신의 사상이나 정서에 비롯된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다.' p.41

 

아버지는 현실, 일본사회, 타 세상을 대변한다. 다이스케는 그러한 아버지가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짓고 있다. 다이스케가 얼마나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고 사회 속 사람들을 무시하는지 알 수 있다. 세상이 아닌 자기가 바라본 자신은 매우 의미 있는 세월을 보내는 중이고 그는 그것이 자신의 사상이나 정서에 비롯됫다고 말하는 점에서 그는 그의 사상과 정서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성실성도 열의도 있습니다만, 단지 그것을 현실적인 인간관계에서 행동에 옮길 수가 없을 뿐입니다.'

'그는 성실성이든 열의든 간에 어떤 완성된 상태로서 자신의 내면에 간직돼 있는 것이 아니라 돌과 쇠가 부딪치면 불꽃이 튀듯이, 상대에 따라서 마찰이 잘 이루어질 때 당사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정신의 교환 작용이라 할 수 있다. 상대방이 나쁘면 성실성이나 열의가 생길 리 없다고 생각했다.' p.45

 

그는 말한다. 현실적인 인관관계에서 행동에 옮길 수 없다고. 결국은 자신의 입으로 현실과 이상을 구분지어버렸다.

도대체 현실적인 인관관계는 무엇인가? 그에 대립되는 인간관계가 존재하는가. 그는 자기나름대로 변명을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비현실적인 혹은 이상적인 인간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무의식중에 자신이 이상속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상대에 따라서 마찰이 잘 이루어져야만 일어나는 현상, 결국 무언가 날아와서 자신에게 부딪쳐야만 반응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다이스케는 매우 수동적인 인물이다. 또한 자신은 온전하니 가만히 있어도 되는 존재이고 누군가에게 직접 부딪칠 필요도 없다고 느낀다. 어쩌면 그는 성실성, 열의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누군가 마찰을 일으켜주길 기다리고 있을 뿐.

그는 성실성과 열의는 자신에게는 내재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실성과 열의는 분명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다이스케는 그것들을 갖고 있지만 아버지의 사상이란 이유만으로 그는 가차없이 추방해버린다. 이는 그가 그의 세상과 타 세상을 너무 명확히 구분짓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상과 그의 사상은 완전히 대립하고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사형을 당하는 것은 너무도 잔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삶에 대한 욕망과 죽음의 압박 사이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느끼는 고뇌를 마음속으로 그려보며 꼼짝 않고 앉아 있자니, 등 언저리의 털들이 온통 일어서는 듯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p.56

 

그는 긴 사색과 안락한 생활 속에서 모든 것을 자신이 통제하고 판단하였다. 타자의 통제에 의한 결과는 그에겐 잔혹한 것이다.  전자는 자신의 의지에 후자는 사형에 해당한다. 결국 현실을 살아가는 그는 욕망과 죽음 사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다. 그리고는 그것을 견딜 수 없어한다.

 

'학창 시절에 사물을 이지적으로 따지고 들며 의심할 때 느끼게 되는 불안을 경험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지속되다가 갑자기 멈춰서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 가곤 했다. 마치 하늘을 향해서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이. 지금이야 그때 섣불리 돌 같은 것을 던지지 않는 편이 더 좋을 뻔했다고 다이스케는 생각하고 있다. 선승의 이른바 대의현전의 경지는 다이스케가 아직 밟아 본 적이 없는 미지의 땅이였다. 다이스케는 그렇게 솔직하고 성급하게 만사를 의심하기에는 너무도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p.89

 

다이스케는 책에서 말하 듯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자신이 직업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면 자신의 정신에 미칠 악영향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돌을 던지면 중력에 의해 다시 되돌아 오듯,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 매우 무의미한 행동이란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다.

그리고 매우 이성적이다. 그래서 감히 사물을 의심하려 들지 않는다. 왜냐, 그는 이미 그의 세계관을 정립하였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시 의심하려 들거나, 새로운 것을 탐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그에게 세상이란 사물은 그저 무의미하게 돌아가는 기계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다이스케 특유의 사색과 관찰의 힘으로 스스로 조금씩 도금을 벗겨온 것에 불과했다. 다이스케는 그 도금의 대부분은 아버지가 덮어씌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금으로 보였다. 많은 선배들이 금으로 보였다.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은 모두 금으로 보였다. 그래서 자신의 도금이 고통스럽게 여겨졌다. 그러나 도금으로 가려져 있던 다른 사람들의 바탕쇠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들여다보고 나니 갑자기 이제까지 매달려 왔던 것이 부질없는 짓으로 생각되었다.' p.99

 

그는 점점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생겼다. 그리고 생각하는 힘이 생겼다. 아버지가 말하는 삶, 선배들이 살고 있는 삶은 개인성이 결여되고 고고하고 현실을 초월한 정신은 매몰된 그저 집단에 예속된 삶이였다. 그는 그러한 삶이 부질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는 자네는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잖은가? 자네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야. 달리 말하자면 의지를 실현할 수 없는 사람이지. 의지가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왜냐하면 인간이니까. 그증거로, 자네는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있음에 틀림없어. 나는 나 자신의 의지를 사회에 실현시키려고 하고, 내 의지로 인해서 사회가 조금이라도 내가 바라는 대로 되었다는 확증을 가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어. 바로 그런 점에 나라는 인간의 존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자네는 단지 생각만 하고 있어. 생각만 하다 보니 관념 속의 세계와 현실세계를 따로따로 분리시킨 채 살아가고 있는 거야. 이런 엄청난 부조화를 감내하고 잇는 것 자체가 이미 겉으론 드러나지 않는 크나큰 실패가 아닐까? 왜냐고? 내 경우 그런 부조화를 겉으로 드러내지만, 자네의 경우는 속에 감춰둔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으로, 사실 그 정도를 따지자면 겉으로 드러낸 만큼 내가 자네보다 덜 실패했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도 나는 자네에게 비웃움을 당하고 있어. 그리고 나는 자네를 비웃을 수가 없어. 아니, 비웃고는 싶지만 세상 사람들은 비웃어서는 안 된다고 하겠지." "아니, 비웃어도 상관없어. 자네가 나를 비웃기 이전에 이미 나 스스로 나를 비웃고 있으니까."'

 

히라오카는 다이스케와 달리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힘이 뛰어나다. 작가는 히라오카의 말을 빌어 현실을 외면한 채 이상만 쫓는 다이스케와 같은 지식인을 비판하고 있다. 이전에는 다이스케를 옹호하였다면 이번엔 비판을 하며 현실에 무감각하지만 정신은 고고한 지식인들의 양면성을 제시한다.

이 대목에서 나소메 소세키는 여태 고상한 척 했던 다이스케라는 인간을 홀라당 까고 있다. 결국 다이스케도 사람이니 의지나 욕망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는 여태 있는 척하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가 실천하지 않는 이유는 곧 게으름, 나태함, 무능력으로 이어진다.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 그는 한편으론 혹은 무의식적으로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 못지않게 그 자신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 스스로 비웃는다. 자신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히라오카와 다이스케의 차이점은 다이스케는 높은 이상을 추구하며 생각만 하고 히라오카는 그러한 이상을 보단 행동으로 직접 의지를 실현시킨다.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적어도 이 대목에서는 히라오카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왜 일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그건 내 탓이 아니야. 말하자면 세상이 그렇게 만드는 거지.'

'모두 빡빡하게 짜인 교육을 받고, 그러고 나면 눈 돌림 틈도 없을 정도로 혹사를 당하니 너나 할 것 없이 신경 쇠약에 걸리게 되지.'

'자신의 일과 자신의 현재, 아니 눈앞의 일 외에는 아무 생각도 없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한 상태이니 어쩔 수 없긴해, 정신적 피로와 신체적인 쇠약은 불행하게도 항상 붙어 다니는 버이니까.'

'온통 암흑이야, 그속에서 나 혼자만이 뭐라고 말한들, 그리고 무슨 일을 한들 소용이 없지. 나는 원래 게으른 편이야.'

'지금이라도 일본 사회가 정신적, 도덕적, 구조적으로 대체로 건전하다면 나도 예전처럼 유망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 그렇기만 하다면 할 일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그리고 태만한 내성격을 극복해 낼만한 자극도 또한 얼마든지 생길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이 상태라면 안 돼.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나는 오히려 나 자신만을 위해 살 수밖에. 그래서 자네 말대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 안에서 나에게 가장 적합한 것과 접촉하며 지내는 것에 만족하고 있네. 나서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내 생각을 따르도록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니 말일세.'

'뭔가 염세적인 듯하기도 하고 무사태평인 듯도 한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굳이 이야기하자면 조금 얼버무리고 계신 것 같아요.'p.105

 

세상이 그러해서 그는 그러한 행동을 한다고 합리화 한다. 그리고 사회가 건전하게 바뀐다면 얼마든지 자신 또한 바뀔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미치요는 얼버무리고 있는 것 같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줄곧 순종적인 미치요가 다이스케에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다이스케는 논리적으로 자신을 충분히 대변할만한 답변을 했지만 작가가 보기엔 그건 변명이고 합리화로 본 것이다. 작가가 실천적이지 못한 다이스케라는 몽상가를 한 번 더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성적인 다이스케는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고 그런 자신이 현실에서 살아남는 방법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실천력이 부족하다. 염세적, 무사태평한 것까지는 좋은데! 사회가 변화한다고 너의 태만한 성격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변명이야! 곧 얼버무리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안락은 곧 근심의 시작. 인생은 곧 갈등의 연속.

완전하지 못한 인간의 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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