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생애와 저작
조지 버클리는 홉스, 로크, 데까르뜨, 말블랑슈, 가쌍디, 라이프니츠의 저작들을 열심히 읽었고 베이컨, 보일, 뉴튼의 새로운 과학에 몰두하며 과학사상을 잘 이해하였지만 과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우주가 궁극적으로 물질적 실체로 이루어졌다는 새로운 과학의 가정이 기독교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유물론에 대한 반박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기도 했다.
그는 1696년 킬케니 콜리지에서 학업을 시작하고 4년 만에 더블린의 유명한 트리너티 콜리지에서 철학, 과학, 신학을 공부했다. 1704년에 문학사, 1707년에 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트리너티 콜리지의 연구원이 되어 1724년까지 있었다. 1709년에는 부제가 됨으로써 성직자의 길에 들어섰고 1721년에는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722년경에는 일종의 기독교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정책을 구상했지만 너무 벅찬 과제라 생각했다. 결혼하고 아메리카로가서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하였으나 잘 되지 않아 교육기관들을 위해 준비한 많은 책과 부동산을 예일대학에 기증한다.
그의 저작으론 「새로운 시각론에 대한 시론, 1709」 「인간지식의 원리론,1710」 「하일라스와 필로누스의 세 대화, 1713」 「운동론, 1721」 「알키프론, 1732」 「씨리스, 1744」가 있다.
2.사상적 배경
그가 태어난 17세기는 근대 과학혁명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과학혁명은 목적론적 세계관을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대체했다. 그 결과 천상세계와 지상세계로 대비되던 두 세계가 동일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단일한 세계로 통합되었다. 또한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흔들리면서 그리스 자연철학 시기의 원자론적 세계관과 비슷한 기계론적, 입자론적 세계관이 다시 등장했다. 그 당시 수학이 발달하고 있었는데 근대 사상가들은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수학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감각경험보다는 이성을 더 신뢰하였고 감각기관을 통해 드러나는 세계는 참된 모습이 아니고 이성의 눈을 통해 파악된 세계가 진정한 세계라 생각해서 실재의 참모습은 결코 경험할 수 없고 오직 마음의 직접적인 대상 관념을 통해 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사람의 주관으로 지각하는 것들과 세계의 본질적인 특성을 나누어 보았다. 근대적 사고는 결국 세계와 분리된 신을 추방하여 이 세계를 절대화해 버렸다.
3.물질적 실체의 부정
버클리는 관념론을 취하며 입자론, 유물론에 대해 반론하였다. 버클리의 관념론은 경험주의를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 경험론의 지속이라 할 수 있다.
물질적 실체를 부정하는 버클리 논증은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우선 표상적 실재론의 이론적 근거인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구분을 ‘감각적 성질을 전혀 갖지 않는 물체란 상상할 수 없다’라고 반박한다. 제1성질과 제2성질은 분리 되지 않고 제1성질 역시 마음속에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모두 지각자의 주관성에 의존한다는 말이다. 실로 지각자의 위치, 관점에 따라 물체의 크기가 다르게 보이고 운동 혹은 정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로크는 관념들은 마음에 있지만 그것의 원형인 성질들은 대상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달리 버클리는 물리적 대상의 모든 성질은 관념을 넘어선 것일 수 없다고 말한다. 로크가 대상이 가진 본질이나 성향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던‘성질’이라는 낱말을 버클리는 ‘관념’ 곧‘경험’의 내용으로 본다는 점에서 버클리가 말하는 관념의 뜻을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러한 버클리 입장은 오직 정신만이 자연계의 모든 현상의 원인이라는 그의 중심주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집약된다. 첫째, 존재하는 것은 오직 관념과 정신이다. 둘째, 우리는 관념으로부터 어떤 힘이나 작용력을 지각하지 못한다. 셋째, 따라서 관념은 어떤 것의 원인일 수 없으며, 관념에는 어떤 원인이 있어야 된다. 넷째, 다른 관념이나 물질적 대상이 관념의 원인일 수 없다(물질적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섯째, 따라서 관념의 원인은 비물질적인 정신이다.
다음으로 그는 추상관념을 공박했는데 그 이유는 ‘물질적 실체’란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무의미한 낱말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그에 따르면 철학적 문제는 언어 남용의 결과인데, 이 남용은 본질적으로 낱말의 의미가 추상관념일 수 있으며, 추상관념은 외연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태 없이 어떤 크기의 관념도, 크기 없이 어떤 색깔의 관념도 형성할 수 없다는 점에서 추상작용을 반박한다. 또 일반어의 의미가 추상관념이거나 그에 의존한다는 것도 부인하였는데 추상관념에 관한 서술은 모순을 낳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있는데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세 번째 논증은 의미론적 논증 또는 인식론적 논증이라 불린다. ‘지지한다’는 말이 건물을 받치는 기둥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될 때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백하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사용한 경우이다. 만약 건물을 기둥을 받치는 경험이 없었다면 ‘지지한다’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결국 경험적인 내용을 빼앗기면 공허한 것이 되고 따라서 물질적 실체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버클리의 주장이다. 이것은 제1성질, 제2성질은 분리되지 않는 다는 그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버클리에 따르면, 우리는 오로지 감각기관을 통해 물리적 대상(관념)들을 지각하기 때문에 마음과 무관한 물리적 대상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라는 버클리 철학의 대전제가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물질적 대상이 존재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지각과 무관하게 존재하거나 그 본성이 물질적인 특성이라는 것은 부인한다. 버클리는 사물들을 ‘관념’이라고 주장한다. 사물이라는 말은 보통 마음 밖에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며, 관념뿐 아니라 사유하는 실체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관념이라는 말은 감각적 대상이 오로지 정신 속에만 존재한다는 말이고 사물이 비사유적, 비활동적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관념은 관념 갖는 존재가 존재해야만 있을 수 있는데, 그래서 버클리는 관념과 그것을 지각하는 존재를 구별한다. 물리적 대상에 적용되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원리의 관념은 수동적으로 지각되는 관념의 세계이고 ‘존재하는 것은 지각하는 것’이라는 원리가 적용되는 정신은 능동적으로 지각하는 정신의 세계인 것이다.
4. 자연철학
뉴튼은 시간과 공간을 절대적으로 보았고 한 물리적 대상은 절대시간과 절대공간 속에서 그것의 위치를 설명하는 것이라 하였다. 시간은 물리적 대상들 너머, 물리적 대상들은 관념들 너머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버클리는 대상들은 마음 의존적이고 시간은 상대적으로 보았다. 그래서 우리가 갖는 시간의 관념은 관념에 의해 측정되는 시간으로 보았다. 버클리의 시간이론은 경험론적인 것이었다.
버클리는 공간과 운동이 관계적이라 주장한다. 공간은 공간적인 사물들에 의존하고 공간적인 사물들은 마음에 의존하므로 공간 또한 마음에 의존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것이 저것의 얼마만큼 떨어졌다고 말하지, 절대공간에 관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물체를 제외한 모든 물체가 없어진다고 할 때 그 한 물체에 부여되는 행동 또한 설명하기 힘들다.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이라는 것이 버클리의 주장이다.
버클리는 수학적 가설과 추상적 낱말을 실재와 연결시키는 것을 비판하며 감각에 의해 지각 되지 않는 모든 형이상학적 요소를 과학에서 추방시키자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과학과 형이상학을 구분하면서 둘 다 동등하게 참이라고 했다. 그는 과학을 일상생활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을 예측하는 것이고 단지 관찰된 사실들의 편리한 요약으로 설명하였다. 결국 자연법칙은 인과적인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고 우리가 보는 것은 연속된 원인과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유일한 인과적 행위자인 정신에 관해 연구하지 않으면 본질적인 참된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반면 과학과 구분한 형이상학은 경험될 수 없는 경험의 원인으로 보았다. 그 원인, 참된 작용의 주체는 신이며 자연현상에서 관찰되는 규칙성은 신의 목적의 증거와 기호로 간주하고 있다. 요약하면 자연철학(과학)은 기호로서의 원인을 다루고, 형이상학은 작용인으로서의 원인을 다룬다. 이렇게 철저히 두 영역을 구분하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선 안 된다고 보았으며 동시에 두 학문은 양립하여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5.형이상학
버클리는 지각하는 능동적 존재를 마음, 정신, 영혼, 자아라고 부른다. 경험론의 원리로 보면 영혼은 존재할 수 없다.하지만 버클리는 내가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고 다른 관념과 같지 않으며 내 관념의 존재는 다른 이들에게 지각된다는 점에서 존재한다고 본다. 버클리는 정신과 정신의 관념을 다르게 보았다. 정신은 능동적으로 관념을 지각하는 실체이고 관념은 그 존재가 정신에 의해 지각되는 수동적인 것으로 보았다. 능동적으로 관념을 지각하는 실체는 불멸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영혼이며 비물질적이고 크기를 갖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의 정신은 지각할 수 있지만 지각할 수는 없다. 우리는 관념들을 지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관념이란 기호를 통해서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신을 지각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신의 존재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을 무한하고 현명하며 자비롭고 전지전능한 정신이라고 본 버클리는 그 신이 우리 마음들로 하여금 관념을 가지도록 만들었고 그 관념이 물질적 우주를 이루기 때문에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설명한다.
나의생각
제1성질, 제2성질의 구분을 반박하는 버클리의 주장에 약간의 오류가 있음을 들자면 제1성질과 같은 비감각적 실체 중 운동성의 예로 자력을 들면 자력은 감지할 수 없지만 힘(력)이 존재하여 다른 존재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그 영향을 우린 관찰 할 수 있다.
버클리에 의하면 모든 물리적 대상은 관념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 관념은 사실 물리적 대상으로부터 감지하여 경험한 것으로 생기는 관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먼저인지 따지다 보면 혼란이 온다. 그 관념이란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는 순수 관념, 마음인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오감으로 감지하여 생기는 관념적인 것인지 확실히 구분을 해야한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관념과 정신이라고 말했지만 버클리는 제1성질, 제2성질의 구분이 없음을 설명할 때 우리가 가지는 감각적인 것을 지각자의 주관성에 의존한다며 우리는 관념, 마음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결국 신체 기관에 의존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두 성질들을 구분할 때는 버클리가 지각하는 우리의 주관성이 관념이라 본 것 같지만 그의 주장 ‘다른 관념이나 물질적 대상이 관념의 원인일 수는 없다’에서 다시 지각을 부정한다.
버클리에 의하면 모든 것은 비물질적인 정신이고 물질적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념의 원인은 다른 관념일 수도 없고 비물질적인 정신이다. 그러면 우리가 신체기관으로 지각하는 것에 의해 생기는 관념도 부정하는 것이고 결국 신체, 물질적인 것도 정신이라 보는 것이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 말한 버클리는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존재하는 것은 관념과 정신이라 말한 버클리는 지각되는 것이 관념 혹은 정신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하지만 관념이나 물질적 대상(곧 지각되는 것)이 관념의 원인일 수는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결국 존재가 부정된다.
버클리의 논증은 구별해서 보면 모두 논리적 연관성을 갖고 타당하여 이해가 되는 논증이 되어 나 또한 그 이론에 동의하지만 그의 모든 논증을 조합하면 오류가 생겨나고 그 오류를 일일이 설명해야 되는 어려움이 발생한다. 결국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같은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논의해야 할 점도 발생할 것이다. 이것은 철학이 가진 허점이고 한계이다. 논리로 모든 것을 풀 순 없다. 논리는 인간의 유한한 능력으로 만든 언어를 통해서 인과관계와 상식을 조합하여 만든 허구의 논리이다. 이미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것은 불완전하고 그것을 창조한 인간이 불완전한데 어떤 논리와 이론이 맞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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